니시무라 에이이치 (19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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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니시무라 에이이치는 1904년 나라현에서 태어나 일본의 정치인이자 사회 운동가로 활동했다.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그는 도쿄로 이주하여 목세공인으로 일하다가, 1924년 결혼 후 상하이에서 거주하며 보험 회사에 근무했다. 사회대중당과 전국대중당을 거치며 정치 활동을 시작했고, 사카이시 의회 의원과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1960년 민주사회당 창당에 참여하여 서기장, 위원장을 지냈으며, 사회 교육 단체와 후지정치대학교를 설립했다. 1953년 요시다 시게루 총리의 "바카야로" 발언 사건으로 바카야로 해산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1971년 사망했으며, 정3위와 훈1등 욱일대수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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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무라 에이이치 (1904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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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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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904년 3월 8일 |
출생지 | 나라현 고세 (구 기타카쓰라기군 고이도촌) |
사망일 | 1971년 4월 27일 |
정3위 | 훈1등 욱일대수장 |
배우자 | 전처: 니시무라 이쿠코 후처: 니시무라 히데코 |
자녀 | 니시무라 신고 (4남) |
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사회민중당 (이전) 전국민중당 (이전) 전국대중당 (이전) 전국노농대중당 (이전) 사회대중당 (이전) 일본사회당 (이전, 1960년까지) 우파사회당 (이전) 일본사회당 (이전) 민주사회당 |
직책 | 중의원 의원 |
선거구 | 오사카부 제2구 (1946년–1947년) 오사카부 제5구 (1947년–1971년) |
당선 횟수 | 11회 |
임기 시작 | 1946년 4월 11일 |
임기 종료 | 1971년 4월 27일 |
이전 | 니시오 스에히로 |
후임 | 카스가 잇코 |
제2대 민주사회당 중앙집행위원장 | '민주사회당' |
위원장 임기 시작 | 1967년 6월 |
위원장 임기 종료 | 1971년 4월 27일 |
위원장 퇴임 이유 | 재임 중 사망 |
학력 | |
출신 학교 | 상하이 프랑스 국민 고등학교 |
2. 생애
니시무라 에이이치는 1904년 3월 나라현 기타카쓰라기군 고이도촌(현 가시바시)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6살 때 아버지가 파산하자 홀로 도쿄부로 올라가 친척 집에서 생활해야 했다. 우에노의 소학교에 입학했지만 졸업하지 못하고 목세공인 일을 했다.
1924년 1월 가네마쓰 이쿠코와 결혼했다. 이쿠코의 오빠가 상하이시에서 섬유 회사 공장장으로 있었기에, 결혼 3개월 뒤 상하이로 건너가 고등학교를 다녔다. 이후 홋카이도 삿포로시로 돌아와 보험회사에서 근무했다.
1928년 사회민중당에 가입했다가 1930년 전국민중당으로 이적했다. 같은 해 7월 전국대중당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31년 5월 사카이 노농학교 개교에 힘썼다. 같은 해 7월 전국노농대중당 중앙위원이 되었다. 1932년 사회대중당 사카이지부를 결성하고 지부장이 되었다.
1933년 사카이시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1937년 총선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1939년 대동아과학경제연구회를 설립했고, 1941년 보험회사 직원을 그만두었다. 1944년 도기 히데코와 재혼했으나, 다음 해 도쿄 대공습으로 집이 불에 탔다.
1946년 총선에 일본사회당 공천으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1948년 1월 사회당 중앙집행위원이 되었고, 4월 아시다 내각에서 경제안정 정무차관으로 일했다. 1953년 2월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요시다 시게루 총리에게 "바보 녀석(바카야로)"이라는 욕설을 듣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는 바카야로 해산으로 이어졌다.
1960년 니시오 스에히로가 사회당을 탈당해 민주사회당(민사당)을 창당할 때 함께 참여했다. 1961년 민사당 조직국장, 1962년 국회대책위원장을 거쳐 서기장에 취임했다. 1967년 니시오의 뒤를 이어 제2대 민사당 위원장이 되었다.
1969년 사회교육단체인 후지 사회 교육 센터를 설립했고, 1970년 후지 정치 대학교를 설립하여 초대 교장이 되었다.
1971년 4월 27일 도쿄의 한 대학병원에서 사망했다. 사후 정3위와 훈1등 욱일대수장이 추서되었다.
2. 1. 어린 시절과 청년기
니시무라 에이이치는 1904년 3월 나라현 기타카쓰라기군 고이도촌(현 가시바시)에서 태어났는데, 집안이 매우 가난했다.[1] 6살 때 목재상을 하던 아버지가 파산하여, 니시무라 에이이치는 혼자 도쿄부로 올라가 친척 집에서 생활해야 했다.[1] 이후 우에노의 소학교에 입학했지만 졸업하지 못한 채 목세공인 일을 하게 되었다.[19] 니시무라 에이이치의 손자인 니시무라 신고에 따르면, "아버지의 아버지는 평생 일한 적이 없는 것 같다"고 한다.[17]1924년 1월, 니시무라 에이이치는 가네마쓰 이쿠코와 결혼했다.[16] 이쿠코의 오빠 류헤이가 상하이시에서 섬유 회사 공장장으로 있었기에, 결혼 3개월 뒤 이쿠코와 함께 상하이로 갔다.[21] 상하이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뒤 홋카이도 삿포로시로 돌아가 보험회사에서 근무했다.[21]

다음은 니시무라 에이이치의 어린 시절과 청년기에 관한 내용이다.
연도 |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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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메이지 37년) | 나라현키타카츠라기군고이도촌 (구 카마다촌, 현 카시바시)에서 출생.[16] |
1910년 (메이지 43년) | 생가가 목재 상을 했지만, 6살 때 파산.[20] 단신으로 도쿄로 나와 친척 집에 맡겨짐.[20] 우에노의 소학교에 입학했지만 졸업하지 못함.[19] |
1924년 (다이쇼 13년) | 1월 - 카네마츠 이쿠코와 결혼.[16] 결혼 3개월 후, 상하이로 건너감.[21] 상하이 프랑스 국민 고등학교에 다님.[21] 홋카이도로 건너가 삿포로에서 츄오 생명에 입사.[21] |
1928년 (쇼와 3년) | 사회민중당에 입당.[16] |
1930년 (쇼와 5년) | 전국민중당으로 이적.[16] 7월 - 전국 대중당 대회에서 중앙위원이 됨.[16] 10월 - 전국 대중당 사카이 지부 결성.[16] |
1931년 (쇼와 6년) | 5월 - 사카이 노동농민학교를 열어 그 중심 인물이 됨.[16] 7월 - 전국 노동농민대중당으로 이적하여 중앙위원이 됨.[16] 보험 회사 근무와 함께 당 사카이 지부에서 활약.[16] |
2. 2. 정치 활동 초기
니시무라 에이이치는 1904년 3월 나라현 기타카쓰라기군 고이도촌(현 가시바시시)의 매우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16] 6살 때 목재상을 하던 아버지가 파산하여, 홀로 도쿄부로 올라가 친척 집에서 생활해야 했다.[20] 이후 우에노의 소학교에 입학했지만 졸업하지 못하고 목세공인 일을 하게 되었다.[21]1924년 1월, 가네마쓰 이쿠코와 결혼했다.[16] 이쿠코의 오빠 류헤이가 상하이시에서 섬유 회사 공장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결혼 3개월 후 이쿠코와 함께 상하이로 갔다.[21] 상하이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뒤 홋카이도 삿포로시로 돌아가 보험회사에서 근무했다.[21]
1928년 사회민중당에 가입했다가[16] 1930년 전국민중당으로 이적했다.[16] 같은 해 7월, 전국대중당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16] 1931년 5월에는 사카이 노농학교 개교에 힘을 쏟았다.[16] 같은 해 7월, 전국노농대중당으로 당적을 옮겨 중앙위원이 되었다.[16] 1932년 사회대중당 사카이지부를 결성한 뒤 지부장에 취임했다.[23]
1933년 1월 사카이시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다.[23] 1937년에는 총선에 출마했지만 9,527표를 얻는 데 그쳐 낙선했다.[23]
1939년 대동아과학경제연구회를 설립했으며,[23] 1941년에는 보험회사 직원을 그만두었다.[23] 1944년 도기 히데코와 재혼했는데,[23] 다음 해 도쿄 대공습으로 집이 불에 탔다.[24]
1946년 4월 총선에 일본사회당 공천으로 출마해 당선되었다.[24] 1948년 1월 사회당 중앙집행위원이 되었으며,[24] 4월에는 아시다 내각에서 경제안정 정무차관으로 일했다.[24]
1953년 2월, 예산위원회에서 요시다 시게루 총리대신에게 국제 정세 낙관 발언에 대해 추궁하던 중, 요시다가 "바보 새끼(바카야로)"라고 욕설을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26] 이는 사회당 우파의 격렬한 항의와 내각 불신임 결의안 제출로 이어졌고, 여당 내 반(反)요시다 세력의 동조로 결의안이 통과되면서 요시다는 중의원을 해산했다. 이를 바카야로 해산이라고 부른다.[7]
1960년 1월, 니시오 스에히로가 사회당을 탈당해 민주사회당(민사당)을 창당할 때 함께 참여했다.[28]
2. 3. 일본 사회당 시절
1946년 4월 총선에 일본사회당 공천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24] 1948년 1월 사회당 중앙집행위원이 되었으며,[24] 같은 해 4월 아시다 내각에서 경제안정 정무차관을 맡았다.[24]1953년 2월,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요시다 시게루 총리에게 지난 시정연설 때 국제 정세를 낙관한다는 발언을 추궁했다. 요시다는 미국과 영국의 정상이 그리 말했으니 믿은 것이라 답했고, 니시무라는 일본 총리로서의 답변을 원한다고 하자 요시다가 "바보 녀석(바카야로)"이라며 욕을 했다.[26] 두 사람의 언성이 높아졌으나 요시다가 사과하면서 사태는 진정됐다. 하지만 총리대신이 의회를 경시했다며 화가 난 사회당 우파가 격렬히 항의한 끝에 내각 불신임 결의안이 제출됐는데, 여당 내 반(反)요시다 세력이 동조해 통과되었다. 요시다가 즉시 중의원을 해산했는데 이것이 바카야로 해산이다.[7]
1960년 1월, 니시오 스에히로가 사회당을 탈당해 민주사회당을 창당할 때 함께했다.[28]
2. 4. 민주사회당 창당과 활동
1960년 1월, 니시오 스에히로가 일본사회당을 탈당하여 민사당을 창당할 때 니시무라도 함께 참여했다.[13][28] 1961년 민사당 조직국장이 되었다.[28] 1962년 1월에는 국회대책위원장이 되었다가[28] 10월에 서기장에 취임했다.[28] 1967년 초대 위원장인 니시오 스에히로의 뒤를 이어 제2대 민주사회당 위원장이 되었다.[13][29]1969년 7월, 사회교육단체인 공익재단법인 후지 사회 교육 센터를 만들었으며,[30] 다음 해에는 민사당과 전일본노동총동맹을 위한 연수기관인 후지 정치 대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이 되었다.[29]
2. 5. 사회 교육 활동
1969년 7월 사회교육단체인 공익재단법인 후지사회교육센터를 설립했으며,[11] 1970년에는 민주사회당과 전일본노동총동맹을 위한 연수기관인 후지정치대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이 되었다.2. 6. 사망
1971년 4월 27일, 도쿄의 한 대학병원에서 사망했다.[11] 정3위와 훈1등 욱일대수장이 추서되었다. 사망 전날, 임종 세례를 받았다.[12]3. 사상과 신념
니시무라 에이이치의 장남이자 자위관이었던 시게타케는 "아버지는 사회주의자였음과 동시에 민족주의자이기도 했다"라고 말했다.[33] 그러나 니시무라의 사상은 복잡하여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웠으며, 특정 주의를 따르기보다는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는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33]
니시무라는 상하이의 국민학교에 다닐 때 세례를 받을 기회가 있었지만, 십계를 지킬 수 없을 것 같아 포기했다고 한다. 그는 "정계는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세계이기 때문에 신의 계율을 지킬 수 없다. 신만은 속이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세례를 받지 않고 있다"라고 말했다.[31]
니시무라 신고에 따르면, 니시무라는 메이지 시대의 가부장적인 가장의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그는 갑자기 화를 내거나 밥상을 엎는 등 가족들에게 엄격한 모습을 보였으며, 선거구 등에서 온후하고 상냥하다는 평판과는 다른 모습이었다고 한다.[34]
3. 1. '바카야로 해산' 관련 일화
1953년 2월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니시무라는 요시다 시게루 총리에게 지난 시정연설 때 국제 정세를 낙관한다는 발언을 추궁했다. 요시다는 미국과 영국의 정상이 그리 말했으니 믿은 것이라 답했고, 니시무라는 일본 총리로서의 답변을 원한다고 하자 요시다가 "바카야로"(바보 새끼)라며 욕을 했다.[7] 두 사람의 언성이 높아졌으나 요시다가 사과하면서 사태는 진정됐다. 하지만 총리대신이 의회를 경시했다며 화가 난 사회당 우파가 격렬히 항의한 끝에 내각 불신임 결의안이 제출됐는데 여당 내에서 반요시다 세력이 동조해 이것이 통과되었다. 요시다가 즉시 중의원을 해산했는데 이것이 바카야로 해산이다.[7]4. 가족 관계
도기 히데코 (東儀秀子|도기 히데코일본어) (1944년 재혼)